Eunbi Ko

태어나서 처음 쓴 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사실상 여름 방학이 없었다. 방학이라지만 오전 내내 선행 교과 수업이 있었고, 점심 급식이 나오는 데다, 오후에도 대부분의 학생이 자율학습실에 남아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학기 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그해의 여름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 건 난데없이 열린 논술 특강 덕분이었다. 제주의 자그마한 인문 고등학교. 당시 다른 지역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친구들은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구호에 맞춰 생활할 뿐, 입시를 위한 그 어떤 요령도 몰랐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생기부 관리, 면접, 입학 사정관.... 이런 것들을 챙긴다기보다 모든 학생이 제때 입학 원서만이라도 넣을 수 있도록 신경 쓰는 것이 전부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중에도 유난히 입시에 열정적인 선생님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여름 방학을 맞이해 고3 학생들을 위한 논술 특강을 열자’고 학교에 건의했고, 본인이 직접 알아낸 서울의 한 논술 강사를 제주까지 초빙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우리 학교 최초의 논술 수업이 열렸다. 미리 신청한 학생들은 수요일마다 점심을 먹은 후 시청각실에 모였다.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논술은커녕 글쓰기 수업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논술로 대학에 가게 될지도 미지수였기에 꼭 특강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매일 문제를 풀고, 오답을 체크하고, 이미 수없이 들여다본 기출 문제를 다시 푸는 일상에 지쳐있었던 나에게, 논술 특강은 일주일에 한 번 ‘입시’를 핑계 삼아 공부하지 않아도 괜찮은 자유시간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수업은 꽤 재밌었다. 선생님이 매주 서울에서 챙겨 온 글감을 함께 읽고, 원고지 칸에 맞춰 글을 썼다. 일주일이 지나면 빨간 색연필로 여기저기 날림 표시가 되어있는 원고지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이 역시 정해진 문제에 정해진 답안을 누가 더 빠르게 서술하냐의 싸움이었지만, 오지선다가 아닌 선택지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조금은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논술 선생님이 좋았다. 제주에 살면서 서울에 가본 적이 한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은 처지였기에, 내 눈에 논술 선생님은 완벽하게 세련되고 지적인 서울 사람으로 보였다. 딱 떨어지는 단발에 쌍꺼풀 없는 눈,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또박또박한 발성 덕분에 존재감이 대단한 여자였다. 혈기 왕성한 학생들을 위해 교실에는 항상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지만,수업하다가 땀이 조금씩 배어 나오면 선생님은 꼭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제주에 오는 비행기에 읽었다며 수다 떨듯 소개해 주는 책들은 하나같이 어렵고 재밌어 보였다. 수업이 끝나고 서점에 들러 선생님이 추천해 준 책을 따라 사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거들먹거리게 됐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면 다 저런 사람들만 있을까?’ 논술 선생님은 내가 살면서 본 여자 중에 가장 똑똑하고, 명쾌한 사람이었다.

여름 방학과 함께 논술 수업이 거의 끝나갈 때쯤, 내가 지원하려고 마음먹은 대학의 자기소개서 제출일이 다가왔다. 논술 수업을 주최한 선생님의 강력한 부탁으로, 나는 운 좋게 논술 선생님에게 자기소개서 일대일 첨삭을 받게 됐다.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선생님과 따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기에 설레면서도 조금은 긴장됐다. 논술 수업이 끝난 빈 교실에서 나는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시간을 들여 내 글을 읽는 선생님의 눈길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게 됐다. 하지만 선생님은 글을 다 읽고 종이 뭉치를 책상 위에 탁하고 내려놓으며 단칼에 말했다. “네 글에서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그러고는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만날 땐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써서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방에 틀어박혀 데스크톱 모니터에 떠 있는 자기소개서 파일을 노려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문득 자기소개서 질문지에 있는 한 문장에 눈길이 멈췄다. ‘특별한 성장 과정이나 가정환경을 서술하시오.’ 바로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니, 그 이야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입시 원서에 써도 될까 싶었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쓰라는 선생님의 말이 생각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쓰다 보니 이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마음속에 꾹꾹 눌러뒀던 무언가가 막아뒀던 봇물이 터지듯 계속해서 지면 위로 흘러나왔다. 누구에게도 꺼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제한 글자 수인 500자를 이미 넘어섰지만, 할 말이 멈추지 않아서 그냥 계속 썼다. 아픈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처음 쓴 날이었다.

일주일 후, 나는 새로 쓴 자기소개서를 선생님에게 내밀었다. 그 어느 때보다 두렵고, 무서웠다. 만약 이 글마저 별로라는 말을 듣는다면, 나라는 사람이 별로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전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내 글을 읽었다. 얼마간의 정적이 지나가고 “이제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이해받았다는 기분이 들자마자, 나는 다시 선생님 앞에서 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선생님은 말없이 내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교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쏟아질 듯한 매미 소리 덕분에,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꺽꺽대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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